알쓸복잡(알고보면 쓸데없는 사회복지 잡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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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는 사회복지

오아시스(沙泉) 2021. 12. 30. 10:51

  현대인들은 하루 평균 10장 이상의 사진을 찍고, 또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하루에 50장가량 본다는 통계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SNSFacebook 한 곳에만도 1초에 4,000장씩 매일 35,000만 장 이상의 사진이 새롭게 업로드된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우리의 삶은 매일 수많은 사진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기뻐도, 슬퍼도, 즐거워도, 우울해도 사진을 찍는다. 심지어 직장에서도 사진을 찍는 것은 일종의 기록물로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찍는 사람, 찍고 싶지 않아도 찍어야 하는 사람, 그렇게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매일매일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나도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지난 10년 동안 찍은 사진만 해도 수천 장은 족히 넘지 않을까 싶다. 사회복지사들은 원래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는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도 사진을 찍고, 회의할 때도 사진을 찍고, 높은 분(흔히 정치인)들이 참석하는 행사를 하면 당연히 사진을 찍는다. 기부를 받을 때도 사진을 찍고, 또 기부된 물품을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할 때도 사진을 찍는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복지사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느냐?’고 물으면 나는 당연히 대학에서 배운 대로 사회복지의 홍보(PR)를 위해서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들이 찍은 훈훈한(?) 사회복지 사진을 보면서, 개인주의가 판치는 각박하고 힘든 세상이지만 사회복지라는 제도를 통해 따뜻하고 희망적인 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무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흔히 사회복지를 휴먼서비스(human services)라고 달리 말한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휴먼서비스(대체로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 자원봉사자 등이 하는 업무적 또는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사회복지서비스)는 어떠한 행위만 있지,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마치 쏟아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더군다나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일하는(마치 공무원처럼) 사회복지사의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증명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돼버린다. 분명 행위는 있지만, 눈으로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믿을 수 없는 이런 모호한 관계 속에서 사진은 가장 확실한 증명 수단이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복지사들은 더 좋은(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찍기 위해 사회복지사들은 사회복지실천기술을 배우기보다 사진을 잘 찍는 기술을 배우고, 사진은 역시 장비 빨(?) 이라며 고가의 카메라를 (세금으로) 구입하기도 한다.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한 이후에는 같은 장면을 수십 장씩 연사(연속촬영)로 촬영해 가장 행복한 순간을 가려낸다. 그렇게 사진 기술과 고가의 장비, 그리고 연사로 찍어 가려낸 한 장의 사진은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던 삶의 질과 행복이 고스란히 박재 된 듯 보인다.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사진만이 사회복지를 보여 줄 수 있다. 그래서 사회복지사들이 이토록 사진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들의 사진을 보고 각박한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볼 수 있다지만, 사회복지사는 오히려 그 사진 때문에 삶이 더 각박해졌다.

사진출처: 한국전력 블로그 굿모닝 KEPCO!

  사진은 작은 프레임 안에 세상을 가두는 틀이다.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사진을 찍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사진의 이미지는 결국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상 일부만 도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세상과 사진으로 보는 세상은 다르다. 사람들은 사진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지 않고 중립적인 카메라가 만들어 낸 진실한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이들의 가치철학과 그것이 놓인 현실적 맥락에 따라 사진의 정치적 의미는 꽤 쉽게 변하고, 그 신뢰성은 끝없이 추락한다.

  사회복지사가 홍보를 위해 사진을 찍는다는 말이 궁색해지는 것도 이와 같은 사진의 교활한 이중성 때문이다. 사회복지사가 찍은 사진에는 개인의 사회복지에 대한 가치와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목적은 무엇인가? 대상은 누구인가? 주민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권력인가?……. 고백하건대 평소에 사진을 찍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정치적이고 이중적인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셔터를 누르기 전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동안 나는 어떤 의도로 사진을 찍고 있었던가.


  제주도에 내려와 스마트복지관 시범사업을 운영할 때는 특히나 더 많은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스마트복지관이 궁금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회복지사가 제주도를 찾아왔었다.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달리 보여줄 건 역시 사진만 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찍고 열심히 보여줬다. 그런데 스마트복지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마주한 스마트한(?) 사진을 보고 사회복지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스마트복지관에서 하는 일들이 담긴 사진은 여느 사회복지사의 일들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도대체 스마트복지가 무엇이냐고. 스마트복지관이 지금의 사회복지관과 무엇이 다르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나조차 아직 스마트복지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라고……. (이 또한 너무 궁색한 변명 인가;;)

  사람들은 같은 사진을 보더라도 각자의 생각대로 그 의미를 달리 해석한다. 스마트복지관의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스마트함(?)을 찾아봤을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결과물과 성과를 찾아봤을 수도 있겠다. 사진이라는 것은 찍는 사람의 의도만큼 보는 사람의 의도도 중요한 것이니까. 스마트복지관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해서 스마트함과 행복감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스마트복지관을 운영하면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스마트복지는 신뢰라는 것. 지금처럼 사진과 숫자에 집착하는 사회복지는 절대 스마트해 질 수 없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사회복지 서비스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회복지사들의 수많은 노력과 그로 인한 삶의 변화를 찰나의 사진 한 장에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사회복지가 스마트해지기 위해서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활짝 웃는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프레임 바깥의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관계가 진정한 신뢰 관계이고, 보여주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하는 사회복지가 스마트복지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다게르(1789~1851)가 사진을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얼굴을 품속에 간직할 수 없었겠고, 수평선 너머 노을이 지는 풍경을 기억에 의존해 상상만 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진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이다. 그런데 요즘은 사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으려 애쓴다. 한 장의 사진을 두고 수많은 이해관계가 서로 얽히고설켜 아주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랑과 행복을 온전히 사진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도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것 한 가지만 말해주고 싶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