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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와 종교

오아시스(沙泉) 2021. 12. 30. 10:41

  2018년 8월, 국회에서 사회복지사업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됐다. 개정안의 핵심은 ‘종교법인이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종교행위를 강제할 수 없다.’는 내용을 신설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이 법이 통과될까?’하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국회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지 채 두 달도 안 된 시점에서 법안을 발의한 11명의 국의의원 전원이 돌연 법안을 자진 철회하면서 나의 반쪽자리 기대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 당시에 나는 또 속으로 ‘그럼 그렇지.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있나... 쯧쯧’하며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민감한 내용의 종교관련 개정 법률안이 쉽게 통과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종교계의 반발은 거셌다. 법률안이 발의되자 마치 조직적인 것처럼 국회 홈페이지에는 수천 건의 반대 댓글이 달렸고,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의 핸드폰으로 법안을 철회하라는 문자폭탄이 쏟아져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국회 밖에서는 일부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와 시민단체들이 모여 ‘정교분리’와 ‘종교탄압’을 외치며 반대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사회복지를 국가 보조금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종교가 ‘정교분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이러한 어설픈 논리에 국회의원들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종교계가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끈질기게 반대행동을 계속하는 동안 정작 법안의 당사자인 사회복지사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 또한 침묵에 동조한 한 사람으로서 큰 소리 칠 상황은 아니지만 아마도 나 같은 (찌질이)사회복지사들은 또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잘못된 것을 알지만 신앙인(부하직원)으로서 성직자(시설장)에게 맞서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괜히 눈 밖에 나서 좋을 것 없으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누가 대신 나서주겠지’, ‘어차피 바뀌지 않을 세상인데 뭐’ 등등이거나 아니면 정말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 무리 중에서 처음 바다에 뛰어드는 펭귄)이라도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1번 펭귄이 나타나기도 전에 법안은 철회됐다(feat. 종교의 눈치만 보는 정치인 + 사회복지사들의 침묵). 이번 사건을 종교인과 사회복지사의 싸움으로 본다면 사회복지사의 완벽한 패배였다.


  사실 사회복지현장에서 종교와 관련된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암암리에 사회복지사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던 이슈 중에 하나였다. 최근 한 조사에서 사회복지사의 77.6%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결과를 발표하자 사회복지사들이 큰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사회복지사들을 이토록 충격에 빠트린 직장 내 괴롭힘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행위나 후원금을 강요하는 행위였다. 예컨대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직원을 채용할 때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더 유리하다거나 채용조건으로 교회 출석을 요구하거나 후원금 명목으로 십일조를 강요하는 사례는 많았다고 한다. 요즘같이 취업하기 힘든 세상에서 그까짓 십일조쯤이야 불우이웃돕기 한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수락했겠다. 그렇게 가까스로 꿈에 그리던 사회복지사가 되었지만 면접시험문제는 곧바로 현실이 되고 만다. 일주일의 시작과 끝은 항상 예배(또는 미사, 예불, 법회 등)를 하고, 회의를 하든지 프로그램을 하든지 밥을 먹던지 뭘 하던지 모든 일의 시작전후로 반드시 의식을 치러야한다. 종교가 없거나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종교행위는 일상 업무와 긴요하게 엮여져 있어 뭐라 말도 못하고 점점 무감각해져 버렸다(feat. 사회복지사들의 침묵).

  어디 그것뿐이랴. 수십 년 경력의 사회복지사를 제치고 대학을 갓 졸업한 성직자(또는 낙하산)가 기관장으로 올 수 있는 것은 법에서 인정하는 종교가 가진 특권 중의 특권이다. 목사님이 법인 이사장이고 사모님이 시설장에 그의 아들딸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은 이 바닥에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아! 이게 바로 ‘가족복지’인가?!).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야 할 부처님오신날과 크리스마스에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자비와 축복대신 야근을 선물하는 별로 반갑지 않은 날이다. 항간에는 시설장이 되기 위해서는 개종(改宗)도 불사해야 하고, ‘삼천배를 해야 승진한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는 사회복지사들끼리만 아는 불문율이라고 하니 참 씁쓸하기만 하다.


 

  사회복지에서 종교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내부적으로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국회 안팎에서 벌어진 해프닝에서 보았듯이 앞으로는 더 이상 사회복지계에서 종교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렸다. 사회복지가 정치의 부산물이 된 지는 이미 오래고, 정치가 종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은 수백 년의 역사가 증명해왔다. 현대사회에서 사회복지와 종교의 문제는 비단 사회복지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복지 등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될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됐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어렵게 만든 법안을 (물론 본인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논의 테이블에 올려보지도 않고 철회한 이유도 다 이러한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세례를 받았고, 종교법인에서 운영하는 시설에서 오랜 시간 사회복지사로 일해 왔던 터라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싶다. 종교가 없는 사회복지사들의 입장에서 무조건적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것도 좀 아닌 듯하고, 또 무비판적으로 종교를 옹호하는 것도 양심적으로 썩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계속 침묵하고 있는 것도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회복지사로서 가오(かお)가 서질 않는 일이기도 하다. 한 10년 정도 고민한 끝에 나는 이제야 ‘사회복지’와 ‘종교’,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접점이 찾고 싶어 졌다. 왜냐하면 종교는 사회복지사의 삶에서 한 번은 마주치게 될 태산이기에......

 

  먼저 종교에서 하는 사회복지활동(편의상 ‘종교사회복지’라고 하겠다.)이 사회복지사업과 동일시 될 수 있는지부터 따져봐야겠다. 나도 종교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에 박사님들의 생각은 어떨지 인터넷을 한번 찾아봤다. 대다수의 논문에서는 종교사회복지의 개념을 종교가 주체가 되어 행하는 복지서비스라고 공통적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나의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는 몰라도 정말 성의가 없어 보이고 실망스러웠다. 사회복지의 개념을 복지대상자가 아닌 복지수행자에 초점을 두고 정의한다는 것은 배움이 부족한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러니 이상한 형태(?)의 가족복지가 판을 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노인버스를 노인이 운전하는 버스가 아니라 노인을 위한 버스라고 정의하는 것이 좀 더 사회복지스러운 개념정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박사님들의 개념정의에 따라 종교사회복지를 따져보면, 종교는 시혜자로서 복지의 주체가 된 셈이다. 종교교리에서 말하는 사랑, 자비, 구제, 보시 등의 술어에는 이미 주는 자의 관대함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종교에서 하는 모든 복지활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종교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이나 해탈로 향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복지는 인간애(人間愛)의 사회적 표현이고, 그것은 종교의 본질적 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복지가 종교의 선교나 포교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복지와 종교가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하면 둘 사이의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실제로 현실에서 종교사회복지시설은 각각의 지향하는 바에 따라 일반사회복지와 다른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아니다. 사회복지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재원의 출처이다. ‘종교사회복지’란 말만 놓고 보면 종교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의 재원이 모두 운영주체인 종교법인에서 지원될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만약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지난번에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목사님들 앞에서 삼천배가 아니라 석고대죄를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종교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들의 예산을 자치단체 보조금과 비교해 보면 종교법인 자체의 지원금(법인전입금) 수준은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보조금에 대한 재정적 의존성은 일반 사회복지시설과 다를 바가 없는데 시설의 운영목적이 사회복지 증진이 아니라 선교나 포교에 있다면 욕심이 과해도 너무 과하다. 상황이 이정도 되면 정교분리원칙은 종교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법률 개정안을 반대했던 종교계의 주장처럼 국가가 사회복지시설 내에서의 종교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정교분리원칙에 위배되는 범법행위라고 한다면 그들이 받고 있는 국가보조금을 과감하게 (전부는 아니더라도) 절반이상 반환하고 통 크게 법인 지원금을 늘려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 헌법수호의 자세를 보여주면 될 텐데 왜 이토록 사회복지에 목말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사회복지는 종교의 자비로운 선택인 것인가.

  책 속에서는 종교사회복지와 일반사회복지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른 줄만 알았는데 현실에서는 별 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니까 이제 둘 사이의 접점이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화제를 바꿔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접점을 다시한번 찾아보자. 오늘날 민간부분의 사회복지는 종교만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나 사회단체와 같은 비정부적 성격을 지닌 기관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부분의 사회복지활동은 서비스 제공주체의 성격에 따라 제공방식이나 특성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오히려 각각의 운영주체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가 사회복지를 민간에게 위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종교의 사회복지활동 과정에서의 종교행위는 일반적인 사회복지사업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오히려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종교의 교리는 사회의 존속과 유지에 필요한 보편적 가치와 윤리성을 제시하는데, 보편종교의 가치와 윤리는 타인과 사회의 복리에 헌신할 것을 강조하는 이타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의 이타적 규범과 예언적 성격은 사회복지실천에 있어서 큰 동기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종교조직체는 귀속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켜줌으로써 개인과 사회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최근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종교의례 역시 개인과 타인의 연결고리로서 집단응집력을 강화하여 현실세계에서 직면한 좌절과 갈등, 고통을 극복하고 삶을 조직화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한 사회복지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따라서 시설 내에서의 종교행위가 직원을 통제하고 구속하기 위한 관례화된 의례가 아니라 복지대상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회복지실천방법의 하나로 이해한다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사회복지학자들이 말하는 사회복지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회적 활동을 가리킨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가 무엇인지, 이를 구분하는 방식이 어떠한지가 복지를 설명하는 기반이 되면서 복지가 본래 사람(수혜자) 중심으로 정립되었음은 대학을 나온 사회복지사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종교가 사회복지의 이념적 배경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종교도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겠는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구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사회복지가 인간의 종교적 욕구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사회복지와 종교의 접점은 결국 사람이다. 사회복지와 종교를 자꾸 제공자 측면에서만 보면 정말 노(no)답이다. 그러나 지역주민과 클라이언트를 중심으로 바라보면 의외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참고문헌*

전명수 (2013). 종교사회복지담론의 재고찰. 종교문화연구

노길명 (2010). 종교 사회복지의 성격과 과제.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epilogue
  이 글을 다 쓰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회복지와 종교의 접점을 찾겠다는 깜찍한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글을 쓰다 보니 사회복지와 종교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모양새는 같지만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는 이 둘의 공통점을 찾느라 애쓰다보니 결국 한 점(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한 점은 모든 만물의 근본이지만 완전체는 아니다. 사회복지와 종교가 각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마주보고 부족함을 채워나갈 때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최종 결론이다. 다 쓴 글을 다시 쓸 수도 없고 이거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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