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복잡(알고보면 쓸데없는 사회복지 잡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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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와 정치

오아시스(沙泉) 2021. 12. 30. 10:37
수많은 이해관계 속 복지와 정치

  스마트복지관이 마을회관으로 이사 온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어느 날, 한 낯익은 정치인이 복지관을 찾아왔다. 그 날은 특별한 기념일도 아니고 선거철도 아니었는데 정치인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마트복지관은 이용자가 드나들지 않는 비현실적인(?) 그런 복지관이 아니던가. 그래서 연락도 없이 방문한 연유를 물어봤더니 그 정치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마을을 지나다 우연히 스마트복지관 보람판을 보고 궁금해서 무작정 올라와 봤다’고 했다. 나는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와 마주앉아 스마트복지관의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꾀나 진지해 보였다. 스마트복지관의 취지와 비전을 얘기할 때는 스스로 가슴 벅차했고, 대한민국의 사회복지 현실을 이야기할 때는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 뒤 그는 자신의 SNS에 이런 말을 남겼다. “복지서비스가 사회개혁의 기반이 되고, 사회복지사가 늘 현장을 챙길 수 있는 복지플랫폼의 씨앗을 보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정치인이 속한 정당의 주최로 스마트복지관의 정책방향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회에는 마을주민을 비롯한 공무원, 정치인, 지역 내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로 마을회관이 꽉 찼다. 사실 스마트복지관이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맨 앞 토론자석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 스마트복지관 사업은 중단될 위기에 처해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토론회가 진행되는 2시간여 동안 멍하니 앉아 다른 토론자들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토론회가 끝난 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만 남은 듯하다.

  직업으로서 사회복지사가 된 지 10년이 되던 해 나는 사회복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현실에 진저리가 나서 사회복지 현장을 떠났었다. 그 때만 해도 다시는 뒤도 안돌아볼 것처럼 뛰쳐나갔었는데 얼마가지 못하고 제주도에 내려와 또다시 이러고 있으니 남들 보기에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스마트복지관은 제주도청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시범사업이라고 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3년의 시범사업이 끝난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는 또다시 영문도 모른 채로 정치와 마주하게 됐다. 나는 지금 복지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10년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복지와 정치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정치의 이면에 가려진 복지

  복지가 잘 된 사회는 좋은 사회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살기 좋은 사회를 이야기 할 때 종종 서유럽 복지국가를 예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유럽의 사회복지는 19세기 말 강력한 군국주의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제도다.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노동자 계급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급기야 이들을 달래기 위한 회유책으로 복지 정책을 실시한 것이었다. 오늘날 ‘사회 정책’이라는 말도 바로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독일의 경제부흥과 사회복지의 이면에는 대자본가와 토지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식민지 확대와 침탈의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해가지지 않는 나라 19세기 영국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 식민지로부터의 부의 이전에 힘입어 노동자 복지를 구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계사에서 사회복지의 시작은 결국 기득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고 하니 사회복지사의 입장에서 마냥 씁쓸하기만 하다.

  복지선진국이라는 유럽의 복지국가들의 상황이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불 보듯 뻔 한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복지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외환위기 이전 당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통치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복지제도를 활용했던 것이 그 시작이다. 대표적으로 공무원 연금(1960년), 군인연금(1960년), 사학연금(1975년) 등 특수 직역 연금제도가 바로 그런 의도에서 도입된 것이다. 당시에 복지제도는 필요한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도입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집단들에게 더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으니 처음부터 복지제도에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제(2000년), 실업보험 확대 적용(1999년), 의료보험 통합(2001년) 등 새로운 복지제도가 도입되면서 정치적 이익보다는 사회적 안전망 확충에 눈을 돌리는가도 싶었지만 이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기대는 곧 실망이 된다. 이 시기에 새로이 도입된 복지제도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정부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 또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MF를 계기로 우리나라 정치에서 더 이상의 복지논쟁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2009년 무상급식 이슈가 터진 이후로 복지는 본격적으로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게 된다. 현재까지도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하는 복지이념 논쟁이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핵심적인 의제가 됐다. 보편적 복지는 진보, 선별적 복지는 보수라는 진영논리는 사회복지사가 보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복지를 대하는 시각이 극도로 편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사회양극화가 지속되면서 복지가 대중적인 담론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그로 인해 시민들은 복지와 정치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인식하고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대 한국의 복지정치는 구체적인 복지정책보다는 대중적인 지지를 둘러싼 선거 경쟁에서 정당이나 후보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정치적 상징으로 복지를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의회정치과정을 통해서 복지정책을 둘러싼 정치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의 지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복지가 논의되고 있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칸트의 미학과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1906~1975, 독일의 정치이론가)는 자신의 저서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칸트의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가 바로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 즉,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고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거기엔 단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만 있을 뿐이다. 반면에 우리가 ‘모나리자’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이러한 사람들의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를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고, 반대로 사적 이해관계를 버리면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도 담겨있다.

  요즘 ‘복지가 곧 정치다!’라는 신념으로 정치를 통해 사회복지를 바꿔보겠다며 정치판에 뛰어드는 사회복지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신념에는 일부 공감하면서도 그 행위는 별로 달갑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회복지사가 정치인이 되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사회복지사가 아닐뿐더러 그런 이유로 복지를 하면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말한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복지가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정치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서 사회복지사는 정치를 그저 관찰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 안에서 복지는 결코 아름다워 질 수 없다. 정치가 복지는 될 수 있어도, 복지는 정치가 되면 안 되는 이유다.

 

*이 글은 『현대 한국의 복지정치와 복지담론(신광영, 2012)』, 『철학의 시대(해냄출판사, 2013)』, 『철학자의 서재 3(프레시안, 2014)』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요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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