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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회복지사 - ② 전문가의 역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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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회복지사 - ② 전문가의 역할

오아시스(沙泉) 2021. 12. 30. 11:03

  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줄곧 주변 선배 사회복지사들로부터 사회복지사는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가 돼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선배가 된 지금 후배 사회복지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인즉, 예나 지금이나 사회복지사가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한다는 것은 이 바닥에서 마치 진리처럼 회자가 되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회복지사들은 멀티(multi-)로 일을 많이 한다. 예컨대 사회복지사가 소위 프로그램이라는 업무를 하나 맡게 되면 계획을 수립하는 일부터 프로그램 운영, 홍보물 제작, 자원봉사자 모집, 후원(?) 개발, 송영 업무(프로그램 이용자나 자원봉사자들을 차에 태워 이동시키는 일)까지 혼자서 도맡아 하는 것은 일상 업무다. 더군다나 이렇게 패키지로 된 업무를 하나가 아니라 두어 개쯤은 기본으로 담당하고 있으니 멀티플레이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거기에다 소방안전 관리, 엘리베이터 관리, 차량 관리, 식당 보조(?), 컴퓨터 수리(?) 등 시설관리나 잡무가 추가될 수 있다. 이런 일에는 남녀 사회복지사가 따로 없다. 나도 10년이 넘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서 그런지 가끔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직접 팔을 걷어붙일 때가 많다.


  나는 축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인 호날두(유벤투스)와 메시(FC바르셀로나)는 안다. 다른 건 몰라도 골 하나만큼은 정말 잘 넣는 전문공격수, 일명 골잡이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얼굴도 멋지게 잘 생겼다. 반면에 나 같은 축..(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로베르토(FC바르셀로나), 램지(아스널), 제라드(리버풀)와 같은 선수들은 잘 모른다. 웬만큼 축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낯선 이름의 선수들이다. 로베르토, 램지, 제라드는 유럽 축구 리그에서 손꼽히는 멀티플레이어들이다. 이 선수들은 공격에서부터 수비까지 경기장의 오른쪽 왼쪽 가리지 않고 감독이 원하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들이다. 다시 말해 축구를 엄청나게 잘하는 선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호날두와 메시는 잘 알면서 축구를 엄청나게 잘한다는 로베르토나 램지, 제라드는 모르는 걸까? 호날두와 메시처럼 얼굴이 잘생기지 않아서일까? 그건 아니다. 이 세 사람 모두 나보다는 훨씬 잘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멀티플레이어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서 멀티플레이어는 많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다재다능(多才多能)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신만의 전문 주특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멀티플레이어의 존재가 팀에서 그 포지션을 소화할 선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해서 자칫 팀 전력이 노출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단다. 축구는 한 팀에 11명이 뛰는 경기다. 호날두와 메시처럼 맨 앞에서 골을 넣는 공격수만 뛰는 것이 아니라 중원의 미드필더와 수비수, 골키퍼까지 다양한 포지션의 선수들이 함께 뛴다. 11명의 선수가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자신의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그 팀은 승리할 수가 있다.


  이렇듯 축구장에서나 있을 법한 멀티플레이어가 사회복지사의 일상에서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것은 어딘가 많이 어색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선배들이 나에게 멀티플레이어가 되라고 한 것은 어딘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말이 좋아서 멀티플레이어지 실제로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부려 먹기 좋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선배들은 항상 사회복지사는 전문가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전문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스스로 전문가라고 말하면서 부하 직원에게 멀티플레이어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전문가는 특정 분야에서 전문기술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것저것 잘하는 사람을 전문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축구에서도 공격수가 수비에 가담하는 것은 팀이 위기 상황일 경우에 잠깐일 뿐이다. 유능한 공격수라면 수비는 전문 수비수에게 맡기고 그동안 힘을 비축하면서 완벽한 골 찬스(chance)를 노리는 것이 진정한 전문 공격수다운 모습이다. 사회복지사도 전문가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멀티플레이어는 전문가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동안 나는 멀티플레이어만큼 많이 들었던 말이 소진(burn out)이라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복지사 직무에 대한 소진이다. 직무소진은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정서적 압박을 받은 결과 발생하는 신체, 심리, 정신이 메말라 가는 부정적 상태를 말하는데, 사회복지사에게 소진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직장인에게 소진은 멀티플레이어처럼 일하면 마치 합병증처럼 따라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사의 업무가 기능적으로 할당되는 것이 아니라 직무(담당업무)에 따라 주어지다 보니 그만큼 업무 부담이 커지게 된다. 개인의 역량은 따지지 않고 사업성과(숫자)에만 신경을 쓴 결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복지사는 일은 일대로 하고, 시시때때로 이런 일 저런 일 주어진 대로 다 하다 보니 야근은 밥 먹듯이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관리자가 된 사람들은 항상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적절한 보상은 하지 않고 책임까지 회피하는 모습이다. 그러는 사이에 사회복지사는 소진은 기본이고 정체성 혼란까지 덤으로 찾아온다.

사회복지사들에게 자주 찾아온다는 소진의 원인은 개인의 역량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물론 예산이 부족해서 사회복지사를 많이 채용하지 못해 벌어진 이유가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멀티플레이(multi-play)를 강요하는 우리의 고질적인 업무 관행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의 정체성 혼란의 원인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복지사의 역량을 강화한답시고 보수교육을 한다는 곳에서는 홍보, 모금, 회계 등과 같은 멀티플레이 교육을 주로 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복지사의 소진을 예방하고 힐링을 한답시고 해외여행을 보내주고 있으니 이런 것을 두고 병 주고 약 준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뭐든지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문가 중에서 뭐든지 잘하는 전문가는 없다. 하나만 잘해야 전문가다. 뭐든지 잘하면(잘하게 되면) 도리어 소진만 더 빨리 찾아올 뿐이다.


사회복지사가 멀티플레이어가 되길 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전문가이길 포기하는 것과 같다. 전문가로서 사회복지사는 멀티플레이어가 되기보다 각기 다른 사회복지 분야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전문가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