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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회복지사 - ③ 전문가의 호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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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회복지사 - ③ 전문가의 호칭

오아시스(沙泉) 2021. 12. 30. 11:05

  어느 날, 대학을 갓 졸업하고 복지관에 새로 입사한 신입직원 사회복지사가 갑자기 고민이 있다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 온 적이 있었다. 이유는 평소 복지관을 자주 찾아오시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자꾸 아가씨!”라고 불러서 몹시 속상하다고 했다. 나는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사뭇 진지한 신입직원의 모습에 순간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그러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신입직원을 살살 다독이면서,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사회복지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몰라서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고 별일 아닌 듯 대충 넘어가려 했다. 그리고 다음에 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면 명함을 드리면서 자신을 사회복지사라고 정중히 소개하라며 업무지시(?)까지 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나의 처신은 관리자로서 정말 별로인 것 같다.

  그 직원을 돌려보내고 나서 혼자 책상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그 직원에게 했던 말들이 후회됐다. 입사한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은 사회복지사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얄궂은 호칭에 얼마나 황당했을지 챙기지 못했다. 아마도 그 직원은 몹시 불쾌했을 것이고, 속으로는 내가 이러려고 사회복지사를 했나하는 자괴감도 들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에다가 직장 상사인 나는 그냥 별일 아닌 듯 넘어가려고 했으니 그 직원은 두 번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할아버지 처지에서 한번 생각해봤다. 그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찾아오는 복지관에서 마주치는 손녀뻘 되는 여직원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는 호칭이 없었을 것이고, 그걸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도 없으니 그 할아버지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우연히 신입직원이 쏘아 올린 공 때문에 나는 이러쿵저러쿵 마음이 참 복잡한 하루였다. 과연 사회복지사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좋을까?


  호칭의 문제는 비단 사회복지사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일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병원에서 환자가 의사를 부를 때 보통 의사 선생님이라고 많이 부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기요!”라고 가장 많이 불린다고 한다. 그나마 의사들의 호칭은 양반이다. 간호사들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저기요!”는 기본이고, “언니”, “아가씨”, “총각”, 심지어 어이!”, “!” 등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호칭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흰 가운을 입고 명확하게 신분이 적힌 명찰까지 차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환자들로부터 이렇게 홀대를 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병원에서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상황이 이 정도인데 복지관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일상은 오죽할지 대충 짐작이 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특히 직장인에게 호칭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직장생활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명함을 건네며 자신이 속한 조직과 직급을 알린다. 그리고 서로 주고받은 명함에 적힌 대로 김 과장님’, ‘박 부장님으로 서로를 호칭하고, 어쩌다 명함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물어보는 것이 예의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성씨라도 같은 날에는 업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본적과 족보의 항렬에 이르기까지 호구조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호구조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결과에 따라 김 과장님김 과장으로 바뀌기도 하고, 쌍방이 모두 성격이 호탕하신 분들이라면 갑작스럽게 생면부지 형님-동생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의 호칭 문화에는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다음에야 반드시 둘 사이의 서열 관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병원에서건 사회복지관에서건 나이가 많은 연장자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어려 보이는) 사람 간에 벌어지는 호칭의 문제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오랫동안 뿌리박힌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잘못된 잔재라고도 볼 수 있겠다.

  유교적 위계질서에 의한 호칭 문화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사회복지조직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처음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 사람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사회복지사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도 상대가 사회복지사임을 확인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나도 선생님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처음 만난 상대를 높여 부를 때 쓰는 존칭의 의미로 쓰는 말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이란 호칭은 그리 오래 쓰이지는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를 선생님으로 부르다가도 상대방의 직급이 확인되는 순간 그때부터는 과장님’, ‘부장님으로 호칭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직급이 확인된 이후에도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왠지 하대(下待)하는 기분이랄까. 그렇다면 사회복지사들끼리 부리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상대 사회복지사를 높여 부를 때 쓰는 존칭으로 쓰는 말이 아니라 다름 아닌 직급이 없거나(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거나) 아니면 확인이 안 된 사회복지사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사회복지사를 부르는 호칭이 딱히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사회복지 현장 어디에서도 사회복지사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나도 10년이 넘도록 사회복지사로 살아오면서 남들이 나를 사회복지사로 불러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몇 년은 늘 그래왔듯이 이유도 모른 채 선생님으로 불리다가, 운이 좋게도 승진을 한 이후부터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팀장님’, ‘과장님으로 불렸다.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나를 사회복지사로 소개하지 않는 이상 남들이 나를 사회복지사로 생각할 리가 만무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조차도 점점 내가 사회복지사라는 걸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고민이 들 때가 많았다. 사회복지사조차 사회복지사를 사회복지사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대게는 이라고 )이라고 부르는데, 팔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복지관에 있는 사회복지사(어쩌면 겉모습만 봐서는 일반인과 전혀 구별이 안 되고 신분이 불확실한 보통 젊은 사람)를 대할 때 적절한 호칭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어딘가 모르게 모순처럼 느껴진다.


  사회복지사는 국가에서 자격을 인정한 전문가다. 국가에서 사회복지사에게 전문가 자격을 주는 것은 해당 업무영역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전문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검사나 변호사, 의사, 세무사, 건축사 등 일명 자가 들어가는 직업군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호칭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자. 검사는 검사님~”, 변호사는 변호사님~”, 의사는 의사 선생님~”, 그리고 사회복지사는 (?!)”이다. 모두 자가 들어가는 직업이지만 불리는 호칭에 따라 사회적 위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사회복지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운가. 사실 나도 한때는 그런 적이 있었다. 사회복지사라고 해서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전문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현실이 스스로 신분을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사회복지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가지 비리와 관련된 문제들도 자신을 스스로 사회복지사로 자각하지 못한 데서 벌어진 이이 아닐까 싶다. 내가 누구인지, 사회복지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나면 그런 해괴망측한 일은 저지르지는 못할 텐데 말이다. 아직도 여전히 멀기만 한 사회복지사의 전문가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 스스로가 높은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부터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가 나를 사회복지사라고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한 명의 직장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남들이 나를,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사를, ‘사회복지사라고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사회복지사가 된다. 누군가의 정체성은 바로 그의 이름을 불러 줄 때 찾을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詩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