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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란 무엇인가?

오아시스(沙泉) 2021. 12. 30. 10:23
사회복지가 내게 묻다

  ‘사회복지란 무엇인가?’ 요즘 내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는 (현재로서는)쓰잘머리 없는 생각이다. 마치 사춘기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했던 것처럼 잘 다니던 복지관을 그만두고 백수가 된 요즘 귀를 막아도 자꾸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빙빙 맴돈다. (설마 백수의 강박증상은 아니겠지?ㅠ) 이제 내 나이도 사십이 넘은 마당에 이러한 황당한 자기물음을 하는 것을 보면 사춘기가 아니라 사십춘기 증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러한 증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사회복지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단순히 스스로 사회복지를 지식으로 갈망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어느 날 문득 사회복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고 해야 할까? 결국 나는 지난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혀 온 그 놈(?) 목소리에서 이제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과연 ‘사회복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물음은 사회복지사에게 ‘나는 누구인가?’처럼 아주 철학적인 질문처럼 들린다. 사람들은 흔히 ‘철학’이라고 하면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들을 떠올리면서 고리타분하고 골치 아프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정답이 뭔지도 모르는 이러한 아리송한 철학적인 질문을 항상 피하려고만 한다. 먹고 살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철학은 왠지 배부른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일을 하면서 언제 한 번이라도 ‘철학’이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싶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로나(COVID-19)때문에 내가 백수라는 사실이 무색해진 요즘이지만, 계기가 어찌되었든 평소에(일할 때) 고민해보지 못한 ‘사회복지사의 철학’에 관해 깊이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이참에라도 나도 한 번 진지해져야겠다.


사회복지와 철학

  사람이 살아가는데 ‘나(자아)’에 대한 인식(철학)이 중요하듯 사회복지사에게도 ‘사회복지’에 대한 철학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철학이라고 해서 흔히들 일컫는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같은 이념 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별게 아니라 단지 진리(眞理, truth)를 탐구하는 노력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복지(사)의 철학을 ‘사회복지의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바닥(사회복지)에 진리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사회복지가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인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만 그저 완벽하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존재를 상상하며 진리를 찾아 헤맸었다. 막연하지만 그러한 진리탐구의 여정에서 철학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인간은 철학을 통해 기존 지식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고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지식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반성 없이는 인류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고 철학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복지 철학’은 사회복지의 (완벽하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인)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회복지의 역사와 지식, 그리고 경험에 대한 자기반성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사회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사회복지사의 철학적 자세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지만)정리하면, 철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 즉, 질문하는 것이다. 철학이 있는 사회복지사라면 주어진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복지사는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할까?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제시한 철학의 영역을 결정하는 질문 네 가지가 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들을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하면 사회복지사가 가져야 할 철학적 태도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사회복지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다. 이 질문은 사회복지사의 지성이 아닌 이성의 한계를 묻는 것이다. 둘째, ‘사회복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는 사회복지사의 행위나 실천목표를 결정하는 것이다. 셋째, ‘사회복지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는 사회복지사가 가진 신념이나 가치기준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질문들은 남은 네 번째 질문 ‘사회복지란 무엇인가?’로 축약할 수 있다. 칸트의 질문은 결국, 자신이란 존재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자기반성)에서 출발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사회복지사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사회복지사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충동으로부터 ‘사회복지의 진리’를 탐구하는 동기를 마련하고, 궁극적으로 ‘(그러면)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왠지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기분이 드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역시 철학은 알면 알수록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이 정도 되면 우리가 왜 일상에서 철학 없이 사는 지 알만하다.

철학이 있는 삶

  (생각을 환기시킬 겸) 올바른 철학을 갖고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Dennis Hong)의 일화다. 데니스 홍은 현재 UCLA 기계공학과 교수이면서 로봇 연구소 로멜라(RoMeLa: Robotics and Mechanisms Laboratory)의 소장이기도 하다. 그는 로봇연구에서만큼은 세계적인 천재과학자로 찬사를 받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로봇을 만드는 근본적인 철학을 바뀌게 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세계시각장애인협회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동차대회를 개최한다고 연락이 왔다. 당시에 그는 이미 무인자동차 개발을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무인자동차에 시각장애인만 태우고 대회에 출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대회가 있던 날, 그는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다. 알고 보니 그 대회는 무인자동차에 시각장애인을 태우고 돌아다니는 자동차 대회가 아니라 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전을 하고 경주를 하는 자동차 대회였던 것이었다. 순간 그는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앞이 캄캄했다. 그냥 무인자동차에 타기만 해도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왜 굳이 직접 운전을 하려고 하는가에 의문이 들었다. 주변에서도 (걱정하는 마음에) 그를 끈질기게 말렸다.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운전을 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한 거 하지 말고 가능한 것을 해라.”라고 말하거나, “시각장애인차를 만들어봤자 팔리지도 않고 돈도 안 될 텐데 뭐하려고 만드느냐? 차라리 돈 되는 것을 해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물며 어떤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위험하게 무슨 운전을 하겠느냐? 그냥 집에 있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데니스 홍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말에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앞만 보지 못할 뿐 나와 똑같은 꿈이 있고, 똑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로봇연구에 있어서도 사람이 컴퓨터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면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철학을 갖게 된다. 그는 시각장애인 자동차대회를 계기로 무인자동차를 만드는 철학이 180도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 드디어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각장애인 두 명을 모시고 자신이 처음으로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를 성공적으로 테스트를 마쳤다. 조금 서툴렀지만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전을 해서 골인지점을 통과했을 때 그는 시각장애인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날 데니스 홍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다고 회고했다. 자유와 독립을 만끽한 시각장애인의 환한 미소를 보고 ‘내가 세상의 모든 시각장애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겠구나’라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로봇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천재기계공학자의 소소한 에피소드이지만 사회복지를 하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크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일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데니스 홍이 돈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봇을 만들었다면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상에서 우연한 계기로 얻은 철학(자기반성)을 통해 로봇연구의 진리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사회복지사의 철학적 자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대학을 나온 사회복지사라면 ‘사회복지 윤리와 철학’은 다들 익숙한 단어일 텐데 최근 일어나는 사회복지 이슈들을 보면 ‘윤리와 철학’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사회복지현장은 혼돈(chaos) 그 자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것이 진리의 속성일터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 사회복지정책이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사회복지 철학이라는 것도 정치적 진영논리에 휩쓸려 달리 해석되거나 아니면 왜곡하고, 누군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다. 또 사회복지사의 철학적 자세라는 것도 맞는지도 틀린지도 모르는 매뉴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진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자기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간혹 철학이 있다는 사회복지사들이 그럴싸한 논리로 현실을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해봤자 괴짜라고 핀잔을 받기 일쑤고, 관심종자로 취급받거나 아니면 현실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혀 조직에서 왕따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회복지사의 철학은 먹고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영영 현실에서 사회복지에서 진리(truth)라는 것을 찾기란 어려울 것만 같다.

  그렇기에 ‘사회복지사가 무엇을 위해 철학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 ‘무엇’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철학으로 가능한 것은 없다’라는 대답이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니스 홍은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로봇들을 만들었다. 물론 재미가 있어서 만들기도 했지만 시각장애인이 운전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는 몰랐던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철학이란 그런 것이다. 철학이 바뀌면 사람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세상은 곧 진리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사회복지사는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아주 민감한 직업이기 때문에 전문가로서 좀 더 특별히 완고한 철학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모습과 생각을 되돌아보고 자기반성을 통해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사회복지의 진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사회복지만큼은 개똥철학 말고 진짜 철학을 말이다.


※참고문헌: 후지사와 고노스케, 유진상 역, 『철학의 즐거움』, 휘닉스드림, 2010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바티칸 미술관 벽화, 고대 그리스의 철인, 학자들이 학당에 모여서 인간의 학문과 이성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출처: 구글이미지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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