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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혁신은 이제 그만

오아시스(沙泉) 2021. 12. 27. 13:53

  최근 대한민국 사회복지계는 정부에서 추진준비 중인 커뮤니티 케어(community care)’ 정책이 뜨거운 감자다. 보건복지부는 앞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거주하면서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복지급여와 서비스를 누리며 지역사회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커뮤니티 케어, ‘지역사회 통합 돌봄정책을 발표했다. 그 첫 단추로 전국 8개 지방자치단체를 선정하여 선도 사업을 실시하고 2026년부터는 보편적으로 정책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나는 커뮤니티 케어 정책이 시작될 당시 정책의 취지와 선도사업의 진행방향을 설명하는 정책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미래 사회복지혁신 정책을 발표하는 복지부 공무원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확신이 차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설명회장에는 공무원들만 가득했고 (민간)사회복지사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공무원들 틈바구니 안에서 정책설명을 듣는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과연 정부의 바람대로 커뮤니티 케어 정책이 대한민국의 사회복지 혁신을 넘어 혁명을 가져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회복지는 과거에도 전달체계를 혁신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러 번 있어왔다. 그 첫 번째 혁신의 시도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초부터 사회복지전달체계 개편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어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1992년에 이르러 공공복지전달체계의 비효율성과 전문성 부족 등을 이유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복지사무전담기구 설치에 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보건복지사무소라는 곳이다. 당시 아는 사람만 알았던 보건복지사무소는 1995년부터 4년 간 전국 일부 지역에만 시범사업으로 추진되다가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복지사무소로 변경되면서 사업이 확대되는가 싶었는데 지역주민들 뿐만 아니라 공무원에게 조차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두 번째 사회복지 전달체계 혁신은 2005년에 있었다. 2차 혁신은 공공과 민간의 복지공급자 및 수요자간의 협력기구인 지역사회복지협의체의 탄생으로 볼 수 있다. 이미 1차 혁신 때 논의되고 있었던 지역사회복지협의체는 시군구지역의 사회복지네트워크를 통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원스톱(One-Stop)으로 제공함으로써 공공사회복지제도의 한계를 보완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범사업으로 출발해 실행과정에서 본래의 취지대로 주민의 참여기반을 확립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정책의 추진 주체인 공무원들의 참여마저 미비했다. 다행히 사회복지사무소처럼 없어지진 않고 지금까지 명맥만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혁신의 시도는 2012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읍면동 복지허브화(향기가 나는 식물 허브가 아니다)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책은 읍면동에 있는 주민센터에 맞춤형 복지전담팀을 설치하고 사회복지 공무원을 대거 채용해서 현장상담을 강화하는 등 주민 중심의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민간 사회복지기관에서 해오던 일까지 공무원들이 하기 시작하면서 주민 중심이 아닌 공무원 중심 복지정책이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2017년부터는 시군구에만 있던 지역사회보장협의체(구 지역사회복지협의체)를 전국에 모든 읍면동까지 확대시행하면서 정책의 확대의지를 보였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민관협력을 위한 협의체의 역할과 정체성은 지역마다 제각각이고 민간 사회복지기관과의 역할갈등은 지금까지 여전한 채로 정책은 추진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회복지 전달체계는 혁신의 혁신을 거듭해왔지만 생각보다 괄목할 만한 혁신은 보여주지 못했다. 세 차례에 걸친 사회복지혁신에도 불구하고, 또 현재 이른바 읍면동 복지허브화 정책이 아직 성과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 와중에 정부는 또다시 새로운 혁신정책카드를 들고 나섰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커뮤니티 케어 정책이다. 물론 복지부에서는 5년 후 본격적인 사업추진을 염두에 두고 시범적으로 시행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지난 과거 수차례 시도되어 왔던 혁신정책들을 지켜보고 실행해 온 일선 공무원들과 사회복지사들은 이번에는 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해 온 사회복지 혁신정책의 로드맵은 누가 보더라도 바람직한 방향인 듯 보이는 데 일선에서의 반응이 이토록 시큰둥한 이유는 무엇일지 나 또한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 원인은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기 전 먼저 시행하는 시범사업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전 항상 시범사업을 먼저 시행해왔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마는 돌다리는 정부가 만들어 놓고 두들겨보는 것은 지자체에게 떠넘기는 격이니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일선 실무자들에게 공감을 얻기 힘들었다. 그리고 시범사업은 말 그대로 시험 삼아 한 번 해보는 사업이다. 성공을 위한 절박함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안일함이 기저에 깔려있다 보니 시작소리만 요란할 뿐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쉽게 식어버리기고 결국에는 뼈다귀만 남은 꼴이 부지기수였다. 정부도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이번에는 시범사업을 선도 사업으로 개명하면서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애매하지만 시범사업과 선도 사업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시범사업은 말 그대로 한 번 시범으로 해보는 사업이지만, 선도 사업은 본 사업을 전체적으로 확대하기에 앞서 몇 개만 먼저 추진하는 사업이란다.) 하지만 지난 세월 수차례 양치기 소년에게 당한 민심이 쉽게 돌아설지는 걱정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공은 정부에서 쏘아 올렸지만 공을 넘겨받은 지자체가 정부의 뜻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볼 일이다.

  두 번째는 원인은 사회복지정책의 혁신을 대하는 관점이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추진해 온 사회복지 전달체계 혁신정책에는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혁신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기존 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사무소가 그랬고, 희망복지지원단이 그랬고, 지역사회복지협의체가 그랬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사회복지정책의 혁신을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경제는 혁신 성장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휴먼서비스인 사회복지는 혁신해서 성장할 수 없다. 그 동안 수차례 사회복지 전달체계 개편 노력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다름 아닌 사회복지를 기술적인 혁신의 관점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서비스는 엘리트들만의 혁신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 사회복지서비스는 정치, 사회, 문화 등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복합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혁신이 아니라 개혁(또는 계몽), 즉 혁명이 일어나야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사람의 생활양식과 사회적 인식과 같은 기존의 체제를 내팽개쳐 놓고 새로운 체제를 도입해서 하루아침에 혁명이 일어난 예는 인류(sapiens)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누누이 강조해 왔지만 혁신은 기존에 것을 개선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책을 설명하는 복지부 사무관은 이번 커뮤니티 케어정책 선도 사업은 기존 정책의 개선과 복지자원들 간의 유기적인 협력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는데, 강조는 중앙정부 공무원이 했지만 실행은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니 이 또한 공을 넘겨받은 지자체 공무원의 몫으로 남겨져 버렸다.


  사실 나는 이번 커뮤니티 케어정책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제주도에서 추진했던 스마트복지관사업과 이번 정부의 정책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케어는 단어가 생소할 뿐이지 본래 사회복지의 궁극적 목적에 가까운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community) 안에서 돌봄(care)을 수행한다는 것은 사회복지실천의 역사에서도 오랜 숙원이었다. 그리고 일선 사회복지사들은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그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현장에서 커뮤니티 케어를 실현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의 사회복지환경(정치, 제도, 인식 등)과 현실이 그만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것은 아니더라도 사회복지정책의 혁신만큼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현실을 변화시키기보다 사람과 환경의 관계를 바탕으로 기존의 것을 계승 발전해 나가면서 장기적인 혁명의 관점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혁명의 과정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구분하지 않고, 또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이고 평등하게, 또한 냉철하고 단호하고 과감하게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 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수렵 채집인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 <사피엔스> 본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류역사를 바꿔놓은 혁명적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을 거쳐 문제를 개선하고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