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복잡(알고보면 쓸데없는 사회복지 잡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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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사회복지

오아시스(沙泉) 2024. 2. 27. 19:06
"주어진 대로 순응하면서 그냥 살면 되지 뭘 그리 세상에 불만이 많아?"
"누구는 좋아서 그냥 사는 줄 알아? 먹고 살려다 보니까 다들 참고 사는 거야."
"넌 뭐가 그리 잘났는데? 모나게 굴면 정 맞는 게 세상 이치야"

 

  사회복지사 일을 하면서 주변사람들로부터 가끔씩 듣던 말들이다. 나는 원래 성격이 사소한 일에도 잘 투덜거리는데다가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읽고 독후감 겸 핀잔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냥 타고난 성격이려거니 하면서 못 들은 척 그냥 넘어갔는데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실증이 나는 법인지라 자꾸 듣다 보니 내가 정말 그런가 싶어 어느 날 문뜩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흔히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을 두고 염세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염세적이란 말은 세상을 괴롭고 귀찮은 것으로 여겨 모든 일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비관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걸 나를 빗댄 말이라고 하면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염세적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기 때문이다. 나의 억울함을 소명하자면, 나는 세상살이가 괴롭다고 여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는 게 귀찮다고는 여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리 세상에 염증을 느끼거나 비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찾아 헤매는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랄까……. 벌써부터 친구들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이게 바로 팩트(fact)인 걸 어쩌겠나. 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나의 구차한 변명을 끝까지 들어주길 바란다.


  사람들이 날 보고 아무리 염세적인 사람이라고 빈정댄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기분이 상하거나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나와 가깝게 지내온 친구들이거나 평소에 친분이 있던 지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염세적이란 말을 너무 자주 듣다보니 감정이 둔해진 건지, 아니면 내 스스로 자기합리화가 너무 심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염세적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나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걱정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 애정이 없고, 나를 정말 싫어했다면 속으로만 욕을 했겠지 사람을 앞에다 두고 무안하게 괜히 핀잔을 줄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라고 애써 합리화를 시켜본다). 같은 이유로 논리를 좀 더 비약(飛躍)시켜 보면 내가 염세적이라는 건 세상을 비관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나의 애정과 관심이 지나쳐서 걱정스런 마음에 세상을 곧이곧대로 보지 않고 비판(批判, criticize)하는 정도지 세상을 함부로 욕하고 비난(非難)하는 그런 못된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삶은 고통, 세계는 나의 표상
(feat. Schopenhauer)

  내가 염세적인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를 좋아한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옛날 사람을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그의 사상과 철학을 좋아한다. 아마도 염세적인 걸로 치면 쇼펜하우어를 따라 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Alles Lebenist Leiden)” 이 말은 그의 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건 200년 전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그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떨쳐버리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은 인생은 고통이라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인생의 고통을 이해한 자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철학은 바로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쇼펜하우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나의 표상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이성은 단지 두뇌현상일 뿐이고, 우리를 에워싼 세계는 개인의 주관적인 의지의 제약을 받는 표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인의 주관적 의지는 사물들을 통하여 다양하게 객관화되는데,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은 그러한 주관적 의지가 객관화된 표상일 뿐이라는 말이다.

 

  역시 철학자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다. 쉽게 생각하면 세상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생각대로, 의지대로) 보인다는 말이다. 결국 세상은 내가 좋게 생각하면 좋은 세상이고, 나쁘게 생각하면 나쁜 세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의지가 변하면 세상도 달라진다는 말도 된다.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인생은 곧 고통인데 그러면서도 모든 인간은 살고자 발버둥 친다. 그것도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본능이다. 그런데 삶이 고통인 이상 살려는 모든 (본능적) 의지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Blinder Wille)”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숨이 막히면 숨을 쉬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고,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육체가 가진 맹목적인 삶의 의지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뿐”이라고 말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이 살고자 하는 그러한 맹목적 의지를 완전히 버리라고 가르친다. 자신의 의지가 구원의 열쇠임에도 그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논리는 정말 철학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람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다는 건 곧 죽으라는 말인가? 만약 결론이 그렇게 났다면 쇼펜하우어는 지금까지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지 못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포기의 대상이 되는 의지는 생존만을 위한 맹목적 의지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그러한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기대어 가능하면 쉽고 빠른 길을 찾으려고만 한다.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인간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했다. 원하는 것을 원하고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본 모습이라고 철학적으로 돌려 까는 말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달랐다.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인간은 본질로서 원하는 마음(예컨대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와 같은)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신의 의지로 인해 고통인 삶에서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먼 길을 돌아 온 기분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염세적이다”라는 건, 즉 염세주의 철학은 주어진 현실을 당당히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삶을 비관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통찰하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삶의 태도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사회복지를 두 번씩이나 그만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복지사로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주어진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나의 개인적 순수 의지였다고나 할까. 만약 나의 의지가 생존을 위한 맹목적인 의지뿐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 복지관에서 일을 하며 열심히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처럼 마흔이 넘은 나이에 쑥스럽게도 새로운 직장을 찾아 헤매는 일은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러한 삶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되는 것이 사회복지다. 그런데 사회복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의 삶이 고통이라는 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같은 사회복지사인데도 개인이 느끼는 삶의 고통은 다 다를 수 있겠다. 신입직원일 때의 고통과 관리자가 되었을 때의 고통은 다르다. 그 고통의 원인이 사람이라면 신입직원은 관리자가 고통일 것이고, 반대로 관리자가 되면 그 신입직원이 고통이거나 거기에 하나 추가해서 담당 공무원이 고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관의 끝에는 항상 객관이 존재한다. 이제 갓 사회복지를 시작한 신입 사회복지사든지, 아니면 사회복지 조직에서 관리자가 된 사회복지사든 간에 각자가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사회복지의 표상은 다르겠지만 그것의 전제가 되는 객관화된 사회복지 현실은 같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사회복지

  지금 우리의 표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객관적인 사회복지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정치인의 사회복지, 공무원의 사회복지, 사회복지사의 사회복지, 그리고 시민의 사회복지……. 각자의 의지에 따라 제각각 표상으로서의 사회복지는 서로 주관적으로 다르게 인식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와 역할, 책임과 의무, 권한과 권력에 따른 주관적 사회복지는 어느새 객관화된 표상으로 우리 앞에 마주하고 있다. 사회복지에도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본래 하나일 텐데 사람들이 각자의 주관적인 의지(―대부분 자신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맹목적 생에 대한 의지―)로 진리를 왜곡 또는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침묵으로 진리를 외면하는 현실은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그러한 자격지심(自激之心)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점점 나이가 들어서인지 남아있던 부끄러움마저 잃어가는 듯 현실에 무감각해져만 간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동안 방황한다.”고 했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마치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면서 방황하는 젊은 베르테르에게서 복잡한 사회복지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회복지사들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너무 집착하면 결말은 비극이 되고 만다.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의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노력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어설픈 희망고문에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진리만을 찾다가는 사회복지사의 삶도 비극으로 끝날까 두렵다. 만약 쇼펜하우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표상하는 사회복지의 세계를 보고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두 번째 사회복지를 그만두고 가족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 거기 어딘가에 있다는 그의 무덤을 찾아 국화꽃 한 송이 헌화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더이상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회복지사가 없길 바란다. #알쓸복잡

 

*참고문헌

이동용(2014),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 동녘, p.21-24, p.88-106

김선희(2011), 쇼펜하우어&니체,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김영사, p.51-60